눈을 감아보면, 방금까지 시야에 있던 사물들의 형상이 흰(어쩌면 노랗게도 보이는) 빛의 테두리로 어렴풋이 남아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잠시 동안 알게 하는 것 같다.

비가 내려 오랜 미세먼지도 씻겨 내려간 맑은 가을날, 혼성듀엣 'B&W'의 연습실을 찾아갔다. 전철을 내려 미리 파악해 둔 출구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몇 번 골목을 꺾어, 지하연습실까지 이어진 가파른 계단을 살펴가며 내려가 드디어 B&W의 살뜰한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멤버인 한찬수씨와 이진주씨는 연습 중이었다. 잔잔한 기타소리를 녹음실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 곡이 끝났을 때 인사를 건넸다. 한찬수씨는 KBS 서바이벌 음악프로 '탑밴드2'에서 '4번출구'라는 팀으로 출전해 쟁쟁한 밴드들과 경쟁하던 모습으로 처음 알게 된 후 종종 만남을 가져와서 잘 알고 있었고, 이진주씨는 최근의 B&W 거리공연에서 한번 보고 목소리에 반해 두 번째 만남이 적잖이 설렜다.

'I've been away too long' 라이브 (원곡 George Baker Selection )

B&W는 시각장애인 혼성듀엣이다.

이진주씨는 남편과 아들, 딸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오다가 녹내장으로 중도에 시력을 잃었다. 남편의 사업마저 잘 풀리지 않게 되면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자 심한 우울증에 빠져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재활에 대한 정보를 접했고, 2009년도에 안마를 배우면서 다시 세상으로 나와 적으나마 본인이 직접 일을 해서 돈도 벌 수 있게 되면서 어느덧 우울증에 빠져있던 자신이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진주씨는 취미로 통기타를 배우게 되고 어느덧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취미생활 만으로는 열정이 채워지지 않아 협회를 통해 알게 된 한찬수씨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한찬수씨 역시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중도 실명을 하게 된 장애인으로서 2006년도부터 시각장애인 밴드 '4번출구'를 결성하여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기타강습으로 만난 두 사람이었으나 한찬수씨는 진주씨의 숨어있던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고, 그녀에게 뜻하지 않은 제안을 하게 되었다고. 그것은 단순히 취미활동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자기와 함께 통기타 혼성듀엣을 결성해서 가수의 꿈을 키워보자는 제안이었다. 뜻밖의 제안을 받은 진주씨는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했으나, 어차피 시각장애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 거라면 음악과 함께 할 때 더없이 행복할거라 생각한 그녀는 한찬수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2014년 1월 본격적으로 시각장애인 혼성듀엣 'B&W'를 결성하게 되었다. 'B&W'란 Black and White 의 준말로,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음악을 통해 밝은 빛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열정 하나만으로 음악을 시작한 진주씨는, 가정에서는 아내와 엄마로, 밖에서는 안마를 통한 경제활동과 함께 매일 기타와 노래연습도 해야 하는 철인3종을 방불케 하는 나날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우울증에 빠져 힘들어하고만 있던 아내와 엄마가 음악을 한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던 가족들은 처음의 걱정을 접고 아내와 엄마의 꿈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진주씨의 남편은 '그래 이왕 하려면 한번 완전히 미쳐서 꿈을 이뤄보라'며 집안 살림을 완전히 도맡기까지 했다고.

한편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의 회장도 맡고 있던 한찬수씨는, 노래를 하려면 건강도 중요하고 특히 폐활량도 좋아야 한다며 진주씨에게 마라톤을 함께하기를 권유했다. 운동이라면 숨쉬기운동만 해 오던 그녀는 한찬수씨의 권유에 못이겨 마음에도 없는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워낙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뭐든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성격인지라 벌써 하프코스를 완주했고 내년 3월에 풀코스 완주에 도전하겠다는 목표까지 세워놓고 운동 또한 열심히 하고 있다.

요즘 진주씨의 일상을 살펴보면, 아침 8시30분 합정동에 있는 삼성화재 콜센터로 출근해서 헬스키퍼로서 직원들에게 안마를 해주고, 오후 1시에 근무를 마치면 이곳 음악실로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기타연습과 노래연습을 한다. 두 사람은 매주 토요일 남산에서 마라톤 훈련을 하고, 한 달에 한번은 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하고 있다. 또 가끔씩 거리공연을 비롯, 각종 모임이나 행사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면서 50대의 나이에 시각장애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누구보다도 밝고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두려움과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장애를 어떻게 '내것'으로 만들고 내 삶을 계속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나갈지는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부터가 아닌 삶의 중간지점에서 어둠을 맞이하고 어제까지 내 앞에 있던 형상들이 이제는 빛의 테두리로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이들은 주저앉아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음악으로 또 다른 빛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장애인들에게 이들의 기타소리가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다음 기사에는 B&W의 인터뷰가 이어질 예정이다.

혼성듀엣 B&W(한찬수씨와 이진주씨)
저작권자 © 한국장애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